'6·25 전쟁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사진)이 2020년 7월 10일 오후 11시 35분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향년 99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인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박원순 전 시장의 빈소가 있는 영향으로 보입니다. 장례식 후에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입니다.
반응은 대체로 박원순 시장에 묻혔지만 갈리는 편입니다. 사실 현역 서울특별시장이 임기 도중 실종되어 사망한 채 발견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박원순에 비해 백선엽 장군은 99세라는 고령에 사망한 것인 만큼 안 묻히는게 이상한 것같 습니다.
백선엽에 대해서와 왜 그가 6.25전쟁 영웅으로 불리게 됐는지와 논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02년 7월11일 육군 등에 따르면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선엽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 기업인입니다.
간도특설대 복무전력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어있는 반면 6.25 전쟁 중 다부동 전투 승리와 평양 선두 입성 등의 성과를 이룬 명장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등, 한국 현대사에서 명과 암을 동시에 지닌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럼 왜 6.25 전쟁때 영웅으로 불리게 됐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는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는 활약을 했다. 때문에 전쟁기간 중 최고의 속도로 진급을 거듭해 마침내 국군 최초의 4성 장군 및 꽤 젊은 나이에 육군참모총장 지위에 오르는 등 한국전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아래 주요 전투에서의 활약상입니다.
1.개전 초기지연전
2.다부동 전투
3.평양전투
4.중공군 1951년 춘계 공세저지
5.빨치산 토벌전
1.개전 초기지연전
광주에 주둔한 제5사단장으로 복무하던 백선엽 대령은 1950년 4월 22일 개성을 포함한 38선의 경비를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보직되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당시 그는 서울에 있다가 07시경 부관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전쟁을 인지했다.
그들이 수색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했을땐 이미 개성은 함락되었고 12연대와의 연락도 두절된 상태로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13연대 장병들이 전차를 상대로 육박공격을 감행하며 파평산에서 버티는 사이 임진강교를 건너온 적에 문산까지 밀린 11연대가 교도대의 증원을 받아 역습, 임진강교의 방어선 확보에 성공했지만 육군본부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38선 전체에서 전면적인 공격이 가해져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일제히 후퇴중이며, 1사단도 퇴각하지 않으면 곧 포위될 것이니 퇴각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시점에서 북한군의 주공이 지향된 포천-동두천 접근로가 완전히 돌파당한 상황이었으므로 1사단이 진지를 고수하는 것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대를 유지하며 퇴각한 것은 아니었다. 1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가 무너져 버리자 포위를 우려하여 참모총장에게 후퇴를 건의했지만 패닉 상태에 있었던 지휘부는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설상가상 인도교가 폭파되자 퇴로가 끊긴 1사단은 그제서야 시흥을 집결지로 선정하고 후퇴를 시작하지만 배도 구하기 어려운지라 몇명의 부관과 함께 행주에서 뗏목을 만들어 겨우 도하가 가능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많은 장병이 도하에 성공하여 시흥에서 부대의 재편이 가능했으나 본인은 이 일로 상부의 후퇴명령을 어기고 부대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오해를 받아 많이 억울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 그나마 사단급 편제를 유지하고 멀쩡히 퇴각할 수 있던 부대는 1사단과 춘천의 6사단, 그리고 강릉의 8사단이 유일했다.
6사단의 경우 후퇴하면서도 제대로 된 전투를 벌였는데 바로 춘천-홍천 전투다. 수도권을 치던 인민군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해 공격의 강도가 덜했던 데다, 6사단은 부대장 재량으로 병력의 외출, 외박을 제한했던 덕분에 비교적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을 3일간이나 저지했고 이때문에 인민군 제2군단장 김광협은 해임당했다.
그리고 8사단의 경우 주문진 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혔음에도 강릉을 빼앗긴 그날 밤 기습공격을 하여 인민군에게 적잖은 패배를 주는등의 활약을 하고 3일간 방어하면서 태백산맥을 타고 안전히 후퇴할수 있었다. (강릉전투)
처음 이틀 동안 긴장과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발에 못이 박히고도 다음 날에나 전투화를 벗었을 지경이었다고 전해지며, 1사단이 상태가 그나마 가장 양호한 부대였으므로 학도병과 신병들을 계속 보충받아 한강 방어선 전투를 시작해서 수많은 방어작전에 주력으로 투입된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악화되어 결국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이 와중에 병사들 속에 섞여 퇴각하던 중 북한군의 추격으로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후퇴와 재편과정에서 7월에는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2.다부동 전투
낙동강을 넘어서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한 인민군의 8월공세에 맞서 국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를 치르게 된다. 북한군은 인민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미군부대를 회피해 국군1사단을 집요하게 노렸다.
다부동 전투 항목에서도 나왔듯이 낙동강 방어선 구축이 늦어 이미 8월5일 인민군이 낙동강을 도하한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대구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8월 15일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되어 육박전이 펼쳐졌고 8월 19일에는 미군 23연대가 뒤를 받쳤다. 그러나 8월 20일 미군 27연대가 국군 11연대 1대대가 후퇴 중이라며 퇴로 확보를 위해 자신들도 철수하겠다는 통보가 오자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병력을 수습하고 2대대 선두에 서서 돌격, 488고지를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백선엽은 권총을 들고 병사들과 선봉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는데, 국내외적으로 사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사례 중의 하나. 일단 이 행동과 비슷한 사례로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일본군 수비대 최후의 돌격을 직접 이끈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 중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대한민국 해병대와 함께 진격한 경우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3세 준장이 노르망디 상륙을 최전선에서 함께 했던 것 정도.
돌격직전 병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결국 8월 21일, 5시간 동안 모든 자원을 투입한 총력전이 펼쳐지고 8월 22일부터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 후 1사단은 다부동을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으로 이동했는데 다부동 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부산에 미 1기병사단이 상륙함에 따라 1사단은 전력재건을 위해 임무를 교대했으나 미 1기병사단은 9월 즈음 북한군의 공격에 주저항선이 붕괴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인천 상륙작전이 실시되어 북한군에 막대한 혼란이 벌어지자, 반격부대로서 다시 1사단을 지휘해 다부동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3.평양전투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으로 역진공하던 때의 에피소드인데,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의 전투력을 의심하자 자신이 직접 영어로 설명하며 '1사단의 전투력과 사기가 매우 높아 UN군의 선두에서 평양을 향해 제일 빨리 전진할 수 있으며, 사단장인 자신은 평양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아와 길을 잘 안다. 단지 자신들에게는 미군과 같은 종합적인 화력이 없는 것뿐이라 만약 1사단에 미군 전차 1개대대를 지원해주면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진격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미군 장군이 '미군은 차량이 많고 기계화되어 이동속도가 빠른데, 보병뿐인 한국군이 어떻게 미군의 전진속도보다 빨리 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자 '잠을 자지 않고 야간에도 행군해가며 이동속도를 늘리겠다'라며 굳은 의지를 보인다. 그리하여 미군 전차대대를 배속받게 되며, 미 육군 부대가 다른 나라 지휘관의 지휘를 받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영국지휘관에게 맡겨진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게다가 약속대로, 실제 1사단 장병들은 야간에도 잠을 자지 않으며 맹행군을 계속해 차량으로 이동하는 미군들을 제치고 전군의 선두에 서게 된다.
나중에는 미군 전차대대 장교들이 '우리까지 밤에 잠도 안 자고 싸울 수는 없다. 전차는 야간에 사고를 일으킬 수 있고 적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라고 하자 전차대대에는 숙면을 취하게 하며 '이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충분히 휴식을 취하게 협조하라'고 하며 배려해줬으며, 실제로 이들은 그 보답으로 주간에 속도를 올려 1사단의 최선두를 따라잡았다. 이때 당시 장교들이 한 말은 정확하게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막힌 대답이라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밝힌 바가 있다.
10월 19일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는 전쟁 당시 최초의 평양 점령이었는데, 1사단과 평양 점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7사단 역시 다른 방향에서 같은 날 평양에 입성해 최초 입성부대라며 자랑하곤 한다. 평양 점령 후 김일성의 집무실에 1사단 지휘소를 차리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본인이 평양 출신이었던 덕분에 평양 점령 시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사단 통신참모가 북한군의 통신선을 발견해 도청을 하다 통신이 연결되어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 통신참모는 평양 사투리를 못해 사단장인 백선엽에게 직접 해주십사 하고 요청을 했다. 백선엽은 유창한 평양 사투리로 현재 적이 유엔군의 전력에 눌려 사기가 바닥을 치고 후퇴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외에도 미군이 대동강을 도하하느라 진격을 못하고 있던 틈에 수심이 얕은 곳으로 병력을 도하시켜 가장 먼저 평양 중심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1사단의 고문관이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느냐고 신기해 하자 "나는 어렸을 때 평양에서 수영을 배웠다. 물 위는 물론이고 물 아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계속해서 북진을 계속해 압록강변에 거의 다다랐지만, 10월 말부터는 중국군의 반격에 휘말리면서 12월 4일에는 통탄스럽게도 애써 점령했던 평양까지 철수하고, 38선 이남으로까지 밀려가게 된다.
4.중공군 1951년 춘계 공세저지
다부동 전투 및 평양 점령에 비해 덜 알려져있지만,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 중 동부전선의 붕괴를 막아내는 데 공헌한 것도 중요한 전공이었다. 백선엽은 1.4 후퇴 기간 중공군의 맹공세를 맞아서도 그럭저럭 제1사단의 건제를 유지한 채 성공리에 퇴각작전을 마무리했으며, 이어지는 반격작전에서도 미군 제1군단 예하로 서울 탈환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던 중 3월 28일에 제1군단 군단장이던 김백일 소장이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백선엽이 후임으로 발령받아 4월부터 제1군단 군단장 직을 수행하게 된다.
당시 제1군단은 전선의 최동단(우익)인 설악산부터 동해안 대포리까지의 구간을 담당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좌익을 유재흥 소장의 제3군단이 맡고 있었던 것. 야심찬 1951년 춘계 공세에 나선 공산군은 서부전선을 노린 4월 공세에서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막혀 전혀 돌파구를 뚫지 못하게 되자, 5월에는 방향을 바꾸어 이곳 동부전선에 배치된 허약한 한국군 사단들을 노리게 된다. 이 공세에서 동부전선을 담당한 중공군 제9병단은 예하 중공군 3개 야전군(12·20·27군)을 주력으로 한국군 제3군단 및 미군 제10군단 우익에 위치한 한국군 4개 사단(3·5·7·9사단)을 통타할 계획이었다.
제1군단 전선은 주공축선은 아니었으나, 북한군 3개 군단(2·3·5군단)이 중요한 조공을 펴기로 했다. 이들 북한군 군단들이 수도사단 전선을 돌파하면, 속사리~하진부리로 진격하여 한국군 제3군단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 격멸하고 제1군단의 증원을 봉쇄할 예정이었다.
1951년 5월 16일 개시된 중공군의 공세는 이 의도대로 착착 맞아떨어졌다. 중공군 제20군은 한국군 제7사단 전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고, 특히 중공군 제60사단은 전선의 틈을 헤집고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만 하루 만에 제3군단의 후방 교통로 상의 요지인 오마치 고개에 도달한다. 이로 인해 한국군 제3군단은 완전히 패닉에 빠져 변변히 싸우지도 못한 채 군단 전체가 하루만에 붕괴되는데, 이것이 한국군 최악의 패배로 회자되는 현리 전투였다. 이 현리 전투에서 붕괴된 2개 사단 병력은 남쪽 오마치 고개 방향으로의 퇴각을 포기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유기한 채 동쪽 방태산 방향으로 무질서하게 퇴각했다. 여기서 공산군의 원래 계획대로 북한군 5군단과 2군단까지 전선을 돌파하여 동쪽 퇴로까지 차단했으면 한국군의 대병력이 꼼짝없이 전멸을 맞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선엽의 제1군단은 원통 일대에서 시작된 북한군 제5군단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초반에 다소 밀리기는 했으나, 수도사단이 한계령에서 북한군의 남진을 완강히 막아내었다. 이 사이에 한국군 제3군단은 조직이 와해되었음에도 병력 상당수가 어떻게든 방태산을 넘어 퇴각 행렬을 이어갔다. 중공군 병력 일부가 계속 제3군단을 추격해 창촌에서 오대산, 계방산을 거쳐 하진부리로 몰아 붙였지만, 북한군 조공이 적시에 따라붙지 못하는 바람에 병력이 부족해서 결정타를 날리지는 못했다. 5월 20일까지 제3군단 소속 제3사단이 3,621명(34%), 제9사단이 4,582명(40%)의 전력을 수습하면서 지연전을 펼 수 있었던 것은 제1군단의 방어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 사이 백선엽은 군단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긴급히 대관령에 투입하여, 중공군이 이를 장악하기 전에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대관령이 함락될 경우, 제1군단 전체의 보급로가 끊기는 것은 물론 전술지원을 톡톡히 해주고 있던 강릉비행장의 미 공군 항공전력도 제 기능을 못하는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한계령에서 대관령까지는 직선거리로만 55㎞에 이르는데, 제1군단은 이렇게 광범위한 좌측면이 노출되고도 일단 영동 지방으로의 관문을 틀어막아 반격의 기회를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좁은 영서 산악지역에서 충분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중공군은 보급난과 증원병력 부족으로 공세의 한계를 맞게 된다.
그러자 미군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고 제8군 예비대인 미군 제3보병사단을 긴급히 횡성을 거쳐 장평, 속사로 투입한다. 그리고 5월 20일, 하진부리에서 백선엽 등 이 지구 야전 지휘관들을 소집해 미군 제3보병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이 중심이 되어 반격할 것을 명령한다. 이후 다른 전선에서 미군이 공세로 돌입하는 한편, 제3보병사단이 5월 22일 운두령을 탈환하며 남하한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는 동시에 제1군단 병력이 역공을 펼치자 중공군의 춘계 공세는 완전히 종말을 맞게 되었다.
여기서 보듯 유재흥의 제3군단이 거듭된 졸전으로 밴 플리트로부터 군단 해체라는 초유의 치욕을 당한데 반해, 백선엽의 제1군단이 그나마 선전함으로써 한국군의 군단급 사령부가 존속할 수 있었다. 또한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의 방어선을 견고하게 유지한 탓에 이어진 반격전에서 한국군은 동부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한참 밀어올려 오늘날과 같이 진부령 이북 화진포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7월부터는 미국과 북한-중국 간의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한국군 대표로 참가하게된다.
5.빨치산 토벌전
1950년 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 고착되어 전투를 치르던 조선인민군 병력들은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핵심 교통로인 경부축선이 차단당하면서 퇴로를 잃게 된다. 다수 병력은 험준한 중부 산악지대를 따라 북으로 이동했지만, 퇴각 기회를 놓친 병력과 전라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잔류하여 빨치산 활동을 벌이도록 조치된다. 특히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의 경험을 살려 김일성에게 남한 후방에 4~5만 명의 조선인민군이 남아 후방 교란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 향후 중공군이 가세한 반격시 큰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이를 권고한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남한에 조직된 당 조직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별로 유격대를 조직해 활동하라고 명령한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불갑산, 백아산, 화학산 등 남부지역 각지의 험준한 산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이 후방 치안을 교란하며 큰 위협이 되자,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제216호'를 통해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기존의 유격사령부(6개 유격대대로 구성), 제2사단, 제5사단과, 새로 편성 중인 제9사단, 제11사단을 배속시켰다. 195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최덕신 준장의 제11사단이 호남지방에서 대대적인 토벌전을 벌였고, 최영희 준장의 제8사단은 1951년 2월 횡성지구 전투 이후 후방으로 이동해, 1951년 4월 제11사단을 교대해 5월까지 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제2사단은 1951년 2~4월에 걸쳐 태백산 일대에 고립된 조선인민군 패잔병 중심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1951년 상반기의 작전을 통해 후방 빨치산 세력이 크게 위축되기는 하였으나, 문제점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자비한 토벌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1951년 2월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과거 국민혁명군 시절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상대한 경험으로 무자비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고집한 영향도 컸다. 여기서 살아남은 빨치산 세력들은 지리산 중심으로 재결집해 인근의 운봉, 곡성, 하동 및 전라선 철도를 교란했다.
결국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는 전방이 소강상태인 틈을 이용해 전방 야전사단 일부를 빼내 겨울 3개월 내에 후방을 완전히 정리할 계획을 세운다. 이는 산악지역에 은거한 빨치산 특성상 숲이 우거지는 봄~가을에는 색출이 어려운데 반해, 겨울에는 잎이 다 떨어지고 하얀 눈밭이 되므로 숨을 곳도 줄어들고 항공정찰로 수색도 용이했기 때문이다. 특히 밴 플리트 자신부터 그리스 내전에 미군 군사고문단장으로 투입되어 공산 게릴라에 대한 토벌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을 적극 밀어붙였다.
그는 백선엽이 제1군단 지휘에서 보여준 능력과 만주군에서 팔로군 게릴라 토벌 경험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사서,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한 Task Force Paik, 즉 백(白)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해 이 대 토벌작전을 지휘할 것을 지시한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백야전사에는 2개 야전사단(수도사단과 제8사단), 서남지구전투사령부및 예하부대, 전투경찰부대를 배속시켰다. 백야전사는 2개 주력 야전사단 소속 6개 연대를 기동타격대로 운용하고, 서남지구전투사 소속 경비부대와 전투경찰부대를 저지부대 및 거점 수비대로 활용해 12월 2일부터 토벌작전에 돌입했다.
백야전사의 토벌전 제1기(1951년 12월 2~14일)는 지리산 포위전으로 전개되었다. 수도사단은 지리산 남부에, 제8사단은 지리산 북부에 배치되어 포위망을 좁혀간 것이다. 12월 6일까지 양 사단은 지리산 능선을 향해 올라가며 포위망을 좁혀 조우하고, 다시 향후 1주일간 하산하면서 중간에 고립된 빨치산을 색출, 섬멸하였다.
제2기(1951년 12월 16일 ~ 1952년 1월 4일)에서는 지리산 외부의 거점까지 대상을 넓혀 알려진 거점들에 대한 정밀 타격을 개시했다. 이 기간에는 각 연대들이 목표를 나누어 전주~무주 사이의 운장산, 함양 북쪽의 장안산, 정읍~순창 사이의 내장산, 회문산, 장군산, 순천 부근의 백운산 등 곳곳의 빨치산을 격멸하였다. 서남지구전투사는 계속 지리산에 남아 미처 소탕하지 못한 빨치산을 계속 소탕하였다.
이후 1월 말까지는 제1, 2기 작전구역을 재점검하며 제3기 작전을 펼쳐 잔적들을 더 철저하게 색출해냈다. 이때 지리산 대성골에 있었던 전투가 작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제1, 2기 작전에서 예봉을 피한 지리산 빨치산들은 1월 혹한기에 접어들어 더 이상의 공격은 없을 것이라 방심했으나, 수도사단이 다시 사단 전력을 동원해 남부능선에서 벽소령 및 세석평전 쪽으로 포위망을 짜고 밀어붙이자 대성골 방향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했다. 17일 밤 ~ 18일에 걸쳐 진행된 이 포위망 돌파전에서 빨치산 약 300명이 사살되고, 251명이 포로가 되는 등 지리산 빨치산 전력의 약 반수가 궤멸되었다. 이를 계기로 남부군 전력은 크게 손상되어 후방부대 및 전투경찰부대 만으로 상대가 가능한 수준으로 위축되었다.
백선엽은 이렇게 약 2개월 동안 예하 부대들을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단기간에 빨치산 세력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특히 그는 '투항자에게는 죄를 묻지 않고 절대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사면장에 자신의 사인을 넣어 비행기에서 살포한 덕에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사면장을 들고 항복하게 만든다. 이는 제11사단장 최덕신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방식이었다. 최덕신은 견벽청야작전을 실행하며 "100명의 공비를 사살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중에 상당한 부분이 양민일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하며 민간인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했다. 백선엽은 이로 인해 남한 곳곳에서 군경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던 상황에서 토벌전에 돌입해야 했다. 오죽하면 김성수 부통령이 백선엽에게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서한을 보내기까지 했다. 백선엽은 이 때문에 토벌작전 중에 적성지역에서 발견되는 이들은 가급적 생포하여 일단 포로수용소로 보내고, 여기서 실제 빨치산과 양민을 구분해내도록 했다. 이 방식으로도 토벌대의 일부 잔혹 행위와 양민 학살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불필요한 희생을 많이 줄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에 국민혁명군 및 광복군 활동을 한 최덕신이 양민 학살의 오명을 남겼고, 간도특설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꼽히는 백선엽이 그나마 피해를 줄이며 성공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공과가 뒤섞인 한국 현대사 인물의 평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백선엽은 이 과정에서의 전과를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이라고 회고했다. 반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는 사살 6,606명, 포로 7,115명으로 집계했다. 여러 기록간에 숫자상으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작전 기간 및 참가 부대 포함 범위와, 후에 양민으로 판정된 포로들의 포함 여부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전공으로 백선엽은 1952년 1월 12일자로 중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백야전전투사령부는 토벌작전을 수도사단에게 인계하고, 다시 전방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 재창설 작업을 맡게 된다.
이후 부동산 투기, 친동생의 선인학원 비리, 독립군 토벌여부등 논란으로 6.25영웅에서 위상은 많이 떨어진채로 생을 마감하셔서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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